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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박 타던 날-최정순(상록문예 121)
이름: 고릴라

등록일: 2013-08-09 08:28
조회수: 3180 / 추천수: 779

                     박타던 날
                                                             최 정 순

서리가 하얗게 내린 늦 가을 아침 !

문을 열면 아래채 초가 지붕위에
하얀 박들이 뒹굴던 모습이
세월이 갈 수록 더 또렸하게 되 살아난다.

이른 봄이면 박씨를 심어
아래채 초가 지붕위로 올렸다.
여름 내 따가운 햇살을 머금고
무성하게 자란 박 넝쿨은 잎이
늘어진채 초가 지붕을 가득 덮고있다.

하얀 박꽃은 수줍음이 많은지 밤에만 핀다.
달빛에 비친 하이얀 박꽃은
소박하면서도 한없는 쓸쓸함이 느껴진다.

그 박꽃이 지고 백일 후면 둥그런 박이 탐스럽게 열린다.

이 때 쯤이면
아버진 바늘과 끈을 가지고 높은 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를 오르락내리락 하신다.

어느 것이 익었는지 바늘로 꾹꾹 눌러보신다.
다 익은 박은 단단해서 바늘도 안들어간다.
이렇게 낙찰되면 끈으로 묶어 미리 표시해 둔다

주렁주렁 매달린 달덩이만한 박이
초가 지붕위에서 반쯤 묻힐때면 박을딴다.

줄기와 잎은 다 말라 버린 채
하얀 알몸으로 뒹구는 둥근 박을 따는 날이었다.
마당엔 큰 멍석을 깔아놓고
우리 아버지는 사다리를 타고 아래채 초가 지붕으로 올라가셨다.

박을 따 내릴때마다 달덩이 만한것 부터
올망쫄망 생김새가 다양해서 보는것 만으로도 재미있고 즐거웠다.

잘 익은 박은 아버지가 흥부네 박 타듯이
익숙한 톱 솜씨로 슬금슬금 잘 타셨다.
우리들은 어린 마음에

'저 박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하고 흥부네 박을  상상해 보기도 했었다.

부엌에선 엄마가 큰 가마 솥에 불을 지피고
속을 파낸 박을 솥에 차곡차곡 엎어 놓고 푹 삶으셨다.
지켜보던 우리 형제들은 박익는 내음이 풀풀나면
수저만 달랑들고 박 겁질에 붙은 속을 파서 양념간장에 버무려 먹어었다.

시큼한 맛 외에는 별다른 맛도없이
좀특유한 맛이었다.
온 가족이 일년중 유일하게 박속으로
끼니를 때웠던 기억이 난다.

삶아논 박은 식기전에 멍석에 엎어놓고
날카로운 놋 수저로 박박 밀어 껍질을 벗겼다.

껍질이 남아 있으면 바가지가 매끄럽지 못하다.
손질한 바가지는 햇볕에 바짝 말려 뒷 방에 매달아 놓고
일년 내내 여러가지 생활 도구로 활용 했었다

아래채 초가지붕 위에 박덩이들이 뒹구는 모습은
아마도 그 시절에나 볼 수 있었던 풍경이 아니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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