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을 추억하며
유 혜 연
연꽃이 탐스런 잎을 딛고
우아하게 피어나는 7월이다.
이 희고 붉은 연꽃을 보며 걷노라니
시리도록 아린 옛 추억이
얼음장 밑 계곡물처럼 가슴팍으로 스며 흐른다.
내 고향 B시에 살던 동창 K군의 추억이
마시다 걸린 냉수처럼 목을 메게 한다.
K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우리 반 반장이었는데 나와 짝꿍이 되었다.
그 전엔 남자반과 여자반이 따로 있어서
각 반에 나뉘어 공부하다가
합반이 되어 같이 앉게 된 인연이다.
서로 얼굴이 마주치면 붉히기도 하고,
집에서 특별한 거라도 가져오는 날이면
다른 애들 몰래 나누기도 하며
은밀히 마음을 확인하던 믿음직한 짝꿍이었다.
그럭저럭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그 새 K를 잊고 지냈다.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나는
남들처럼 넓은 세상 살길을 찾아 도회지로 나왔고,
직장에 매달려 정신없이 살고 있었다.
스물한 살 피어 날 연꽃처럼
가슴속 바알간 마음이 봉긋이 봉오리 질 때였었다.
우연히 어느 한 대학생으로부터 편지를 한 통 받게 되었다.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 혜연 씨 짝이었던 K입니다!
지금은 B시에서 살고 있어요.
아주 어렵게 수소문해서 겨우 주소를 찾아 편지를 쓴답니다.
졸업하고 나서 지금까지 저는 혜연 씨를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혜연 씨가 좋다면 꼭 편지 나누고 싶고, 얼굴 보며 지내고 싶습니다!
답장 주십시오.”
꽃편지지에 대각선으로
큼직큼직 하게 내려쓴 사연을 펼쳐보는 순간
몸은 가위눌린 듯하였고
가슴에서는 쿵쾅쿵쾅 방망이질을 해대는 것이었다.
‘그래, 누군지 알겠다. 그로구나.’
생각이 떠오르자 금세 내 마음에는
부드럽고 얼굴 잘생긴 K에 대한 그리움이 파도처럼 일었다.
우리는 한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다.
K는 대전서 학사장교였고
당시 누구나 선망하는 그런 대학생이었다.
난 동창으로 초등학교 짝꿍이 사랑스럽고 반가워서
답장을 보내곤 했지만
내 마음 속에는 늘 부담이 여운처럼 남았다.
그것은 K와 편지를 주고받을수록
K는 점차 이성으로 나를 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사랑하는 연인으로 대하는
문장이 강할수록 나는 그게 걱정스러웠다.
편지를 주고받는 것이 고민이었다.
왜냐하면 우리 부모님들이
세상에 둘도 없는 엄한 분들이셨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연애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나는 부러진 다리를 끌며 쫓겨나야 할 게
뻔 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분위기에서 K와 이성으로 지낸다는 것은
프라이팬에 올라서는 것처럼 무서운 일이었다.
그를 향한 마음에 사랑의 피는
점점 붉게 흘렀지만, 보내는 답장은 반대로 줄였다.
그리고 마침내는 냉정하게 편지를 끊었지만,
그리운 마음은 속을 검게 그을리고 있었다.
그럴수록 그에게서는 좀 더 적극적으로
친구가 아닌 여자로 대하는 핑크빛 편지가 줄을 이었다.
사진을 보내달라고 하였다.
만나자고 하였다.
더 이상 침묵만 지킬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고별 편지를 보내 확실하게 뜻을 전해야 했다.
“저는 아직 이성이나 결혼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친구로만 알았습니다.
부모님께서 완고하셔서 먹구름이 몰고 다니는 번개처럼
어떤 불호령이 내리칠지 모릅니다.
나중에 시집을 간대도
그 분들이 정해주는 데로 가야할 것입니다.
이젠 편지 그만 해요.
죄송하지만 마음에서 잊어 주세요!”
푹푹 찌는 한여름 밤의 무더위를 견디듯
속의 아픔을 애써 참으며 잊으려고 발버둥 칠 때쯤
K에게서 답장이 왔다.
장장 다섯 장으로 된
그 아련하고 구슬픈 추억을 지니게 한 그 편지!
그 편지의 마지막 장 끝 다섯 줄 사연!
“~깨끗한 물로 자란 콩나물같은 여린 사람이 되지 말고,
진흙 속에 곧은 줄기 세우고 피운 연꽃다운
사람으로 아름다운 여인으로 서시기 바랍니다!”
그 후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어려울 때면 가끔은 K의 주옥같은 편지를 떠올리곤 한다.
늘 그 문구를 생각하면 힘이 솟는다.
마치 큰 태풍이 지나고 난 뒤의 청명한 하늘처럼
맑고 고왔던 그의 목소리가 떠오르고
우정 깊은 사랑이 그리워진다.
부모님이 무서워 부담스런 이성 때문에
내 마음과 다르게 매정히 돌아서야 했던
옛 이별이 여름안개 속 화반 위에 부풀며
피어나는 연꽃처럼 그리움으로 자아난다.
‘그 때 한번이라도 그를 만나 줄 걸!’
하는 아쉬움에 지금도 가끔은 찾아보고 싶고,
어찌 사는지 살짝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은
내가 외로워서만은 아니겠다.
내가 만나주지 않아
마음의 고통으로 힘들어했을 K에게
한없이 미안하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사과의 편지 한 통 보내고 싶은 7월,
연꽃 흐드러지게 핀 두물머리에서의 떠올린 추억이다.
인제 이 연꽃밭 저 끝까지 다 걸어 지나거든
연꽃추억의 아지랑이는 모두 날려버리고
은갈치 한 두름 사가지고 가
아침에 나온 나를 기다린 가족을 위해 노릇노릇 구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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