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록에 펼치는 꿈
추 미 경
공부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는
두 번째 상록이라는 사랑의 문을 두드렸다.
“선생님 오셨어요?”
강습 차 드나드는 학교나 복지관 등에서 활동하다보면
내 분야에서는 으레 선생님이란 호칭에 익숙해 있다.
그러나 이력서를 쓰게 되거나 담소의 자리에서
학교생활이 소재가 되면 입을 꼭 다물고 있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
가만히 있는 나에게 으레 몇 학번이냐?
, 전공이 뭐냐?
등으로 물으며 베일에 싸인 여자라며 날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럴 때마다 나도 당당히 말할 수 있는
학교생활을 만들어 보자고 상록을 떠올리게 된 것이었다.
입학식은 언제쯤일까 궁금해 하며
전화문의를 했더니, 9월3일이라고
상담선생님께서 서둘러 접수하라고 안내해주었다.
우선 전화접수부터 해놓고 가야할까, 말아야할까 고민에 빠졌다.
너무 급하게 내심으로 판단해서 결정해놓고
가족들에게는 뭐라고 이야기를 드려야 하나 걱정이 되었다.
내 마음의 갈등 속에서 입학식 날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마침내 입학식 날, 학교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연세 많으신 분들이 앉아계셨기 때문이다.
그 분들을 보면서 아직도 망설이던 마음이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
갈 때와는 다르게 돌아오는 길에는 콧노래 속에 기대와 기쁨으로 벅차올랐다.
그런데 학교에서 나누어준 교과서를
그대로 집으로 가지고 들어가기가 두려워서 한곳에 감추어 두었다.
마치 훔친 물건을 숨기듯이 가슴은 왜 그리 뛰는지 몰랐다.
그날 저녁 단호하게 내 결심을 말했다.
내 결심을 듣고는 가족들은 걱정스러우면서도 조심스럽게,
그러나 흔쾌히 “인정”하고 소리쳐 주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여 주었다.
“자아를 찾고자 하는 자에게 우주는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했지!
열심히 해봐.”라며 남편은 내 어개를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15년여 전에 야학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지금의 상록은 그때의 상록야학과는 많이 변해있었다.
아직도 수업을 맡아하시고 계신 최대천 교감선생님이나
황기연 선생님의 모습에서 세월의 흐름을 느꼈다.
전에는 반장도 꼭 남자가 맡아서 해야만 했다.
시험을 잘 보면 시상도 해주었다.
그때도 느낀 것이지만
지금처럼 시상을 안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매번 상 받는 사람은 쑥스럽고, 죄송하고,
못 받는 사람은 그들 나름대로 애로 사항이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학생 두 명에 선생님 한 분이 상담을 맡으셨는데,
학생들이 겪게 되는 어려움이나 문제들을 대화를 통해 풀어줄 수 있어서 좋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우리 상록 선생님들의 희생과 열정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사랑이요, 희생인 것이다.
지난날 공부와는 인연이 없나보다
눈물을 흘리며 지내던 때가 많았다.
동생이 8명이나 되는 큰딸로 지금까지 살아왔다.
얼마 전 막내동생을 시집보내면서
5년 전 돌아가신 어머님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힘들게 살면서 고생하시다 돌아가시고,
일찍 가시면서 이 큰딸에게 좀더 복도 주시고
더 살갑게 잘해주시지는 못하셨는지 원망 아닌 원망도 해본다.
유난히 책을 좋아했던 나는
엄마에게 공부와 일을 구분 못한다고 매일 혼나다시피 했다.
또 밤늦게 책을 보려고 해도 전기와 석유 쓴다고 성화를 하시는 바람에
방문을 이불을 드리워 걸어두고 공부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두고 공부하다 지쳐 잠이라도 드는 날은
또 아침에 들켜서 잔소리 야단을 맞아야 했다.
집에서 이래저래 야단맞고,
동생들 때문에 야단맞고 그래도 학교에서는 모범생이고 우등생이었다.
그 당시 종례 때 건빵을 나누어 주셨는데,
선생님께서는 언제나 나를 불러 한 바가지씩 더 주시곤 하여
또래 아이들에게 시기를 받기도 했었다.
한번은 선생님께서 중학교에 진학할 사람은
집에서 물어보고 오라고 시키셨다.
집에 와서 엄마한테 여쭈었더니 당장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 추리닝 사줄게. 중학교는 가지마라!”
하셨을 때,
“싫어요. 추리닝 안 입고 중학교 올라갈 테야요.”
라고 말했었다.
우리 동네에 추리닝이 처음 들어와 유행이던 참이라 뿌리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제 인생의 절반을 살았다지만,
산다는 게 내 뜻대로 안된다는 게 진리임을 깨닫고
원치 않는 길로 갈 때 절망감이 앞선다.
돌이켜보면 그런 와중에도 이렇게 밝고 건전하게 살아온 내가 신통할 정도다.
이제 나머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사람들은 뭐가 답답해서 사서 고생하느냐 그런다.
하지만, 꿈과 이상을 갖고 남과 더불어 명예로운 삶 속에 살고 싶다.
스스로 당당하고 남들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
이제까지 남들에게 받고 살았던 관심과
사랑을 필요한 이들에게 돌려주고 싶다. 깨어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 오늘도 학교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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