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찬 태양처럼 찬란히 빛날 날 기다리며
그렇게 길던 장마와 찌는 듯한 더위 떡시루 같던 여름이 가고 가을이 되었습니다.
들녘 밤나무는 이제 붉은 알밤을 자랑하고,
하늘은 높고 파라서 금방이라도 빨려 올라 갈 것 같습니다.
어찌나 평화롭고 푸근 넉넉하던지 오늘 저희들의 영광스런 졸업을 맘껏 축하하는 것 같습니다.
감사하고 존경하옵는 선생님들!
오늘은 저희가 그렇게 갖고 싶었던 졸업장을 받는 날
제자 사랑 하늘같은 선생님들에 그 은혜 감사함을 어떻게 말로 다 하겠습니까?
지난세월 저희들 옆에서 늘 물심으로 다독여주신 교장선생님,
언제 어디서 만나든지 희망과 용기를 주시던 교감선생님,
한자라도 더 가르쳐주시려고 애쓰신 여러 선생님들,
함께해주신 이웃 후원자 어르신들의 정성어린 은혜에 큰 절을 올립니다.
존경하옵는 교장선생님께서는 31년간 한결같은 마음으로
이 좋은 터전을 만들어 너그러운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더불어 선생님들께서는 어두운 밤 등불을 밝히며
가르침을 하늘이 준 봉사로 받들며 생명처럼 소중히 펼치셨습니다.
이에 저희들은 낮에는 가사와 직장에서 지친 채 다시
책상 앞에 앉아 늦은 밤 배우다보면 몸은 천근만근 고통스러우나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말씀 하나 표정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열정만은 드높게 불타올랐었습니다.
꽃같이 사랑스런 후배님들!
제대로 무엇 하나 해준 것 없는 우리를 선배님이라며 따르며
어떤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고 지금까지 한울타리에서 사랑해왔습니다.
후배님들!
다정다감한 그 마음으로 이제 떠나는 우리 대신 선생님들께 존경으로 배우고,
새내기 신입생들을 더 많이 사랑하고 아껴주십시오.
여러분들은 우리들이 머물다 두고 간 마음의 꽃이요, 희망이요, 추억입니다.
꿈과 용기를 가진 자만이 새로운 것을 찾고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그 도전은 힘들겠지만 적극 공부하며 좋은 친구 사귀고 많은 추억 쌓으십시오.
그러면 후배님들도 아침하늘에 떠오르는 희망찬 태양처럼 찬란히 빛날 것입니다.
선생님들!
길을 지나다 우연히 발견한 전봇대의 광고 한 장이
저희에게 또 다른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배우지 못해 주눅 들었던 인생이 이제는 자신감으로 새로운 재미를 누립니다.
처음 서릿발 같은 낯설음 속에 시작한 공부였는데,
인연의 다리가 놓여서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의 절반 세월을 껑충 건넜습니다.
이 긴 여정 속에는 아픔과 고통. 때로는 학우 간에 싸울 때도 있었고,
또 어떤 날은 손에 든 것들을 아주 박살이 나게 던져버리고 싶은 생각도 갖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며 긴 터널을 지나 한걸음 이만치 올라서서 뒤돌아봅니다.
참으로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상록에 숨어 있었습니다.
반짝이는 금이 불속에서 단련되듯이 함께 어려움을 이겨내니 저희들 마음에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합니다.
화엄사 동트는 이른 아침 울창한 나무와 숲과 맑은 계곡, 아름다운 꽃들이
단발머리 소녀들을 반기던 수학여행, 깊은 정 샘물 솟는
글둥지 친구들과 형형색색의 향기를 지니던 문학기행,
이른 아침 팍팍한 김밥에 사랑을 나누어 마시며 안동 사과따기체험,
서울시내 조선궁궐에 외국인이 더 많다고 이채로워 하던 고궁탐방,
학생모집 광고지를 붙이러 밤길을 헤매다 대문 앞에 붙인다고 욕을 먹고
파출소에 간 광고작업, 그리고 비온 날 전봇대에 붙이다 전기를 먹은 친구도 있습니다.
2월 한 달 선후배 뒤엉켜 밤새워 연습한 것을 외대강당에서 공연하며
끈끈한 정을 들이던 개교기념 학예발표회, 푸짐한 음식과 막걸리,
달리고, 넘고, 차며 신입생들과 정들이며 화합하던 신입생환영체육대회 비가와도 즐거웠습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아름다운 마음씨가 들판의 민들레처럼 노랗게 웃음 번졌던
서울숲 봄소풍, 가을 단풍 곱게 깔린 우이동 골짜기에서 선생님과 마주 앉아 나누던 정담으로
밤새는 줄 모르던 엠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련하게 추억되어 울컥 사랑이 솟는 것은
아직 저희가 야물지 못해선가요?
선생님들!
봄 아지랑이 아리아리 피어오르거든
그 분필 한통 들고 기억의 강 헤엄쳐 오셔설랑 저희들을 다시 불러 주십시오.
우리 가슴 혼을 앗았던 선생님 그 가르침을 다시 들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후배님들!
상록의 안에서 공부하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지 아셔야 합니다.
기회 될 때 열심히 아주 열심히 하세요.
다시 한번 말해주고 싶습니다.
시작이 반이지만 시작하는 그 시점은 정말 지금이라고!
찾아오는 동안은 돌아왔을지라도 지금부터 시작하면 그게 지름길입니다.
매미가 며칠의 삶과 사랑을 위해 오랜 시절을 어두운 땅속에 유충으로 지내다가
마침내 날아오르듯이 이제는 소중한 배움을 얻어 떠나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아쉽지만 선생님들과 후배님들 우정이 저희와 긴긴 시간 돈독하고 끈끈하게 이어질 것입니다.
이 순간 졸업이란 처녀가슴에 총각바람 부는 듯 설레기도 하지만
이제는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 어느 한곳에 찬바람이 스미듯 쌀쌀합니다.
아쉬운 마음 발길을 막습니다.
비록 떠난다 하더라도 먼 후일 큰 그리움 고개 들면 상록 그 푸르게 온몸 치장하던 기억 떠올릴 것입니다.
그때마다 선생님들은 저희 언 가슴에 향기로운 열기 피어날 것입니다.
그동안 플라타너스 몸으로 겨울을 견디며 떼어 낸 청딱지 자국처럼
고통을 이겨내고, 벗나무 가지에 알알이 검붉게 익는 버찌처럼 향기롭게 다시 태어났습니다.
저희들도 이제 세상에서 태양이 되고 이슬이 되어 너른 산하 더욱 푸르도록 생명을 불어넣겠습니다.
비록 삶의 터널이 길어 마음이 고단할지라도
상록을 그리며 바다 외길로 향하는 거북의 알이 되고,
배반 없이 사해를 헤엄쳐 모천으로 돌아오는 은어가 되겠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옵는 선생님들!
우리들은 서로 모르는 채 지척에 태어나고 자랐으나
상록에서 만나 하늘땅 번개로 통하고 이제 떠나야하는 맘
아쉬움만 한여름 날 계곡의 그늘보다 짙습니다.
섭섭하고 서글픈 마음 2년, 아니 4년간 정든 상록 이쯤에서
더 넓은 세상으로 떠나렵니다.
마지막으로 감히 이 말은 하고 떠나렵니다.
옛날의 저희들이 아닙니다.
겨우 한글만 깨우쳤던 그 산골의 양 갈래 머리 소녀들은 잊어 주십시오.
이제 이만큼 자라 세상을 나란히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모두가 존경하옵는 선생님들의 태산같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들! 이제는 떠나렵니다.
부디 상록에 오래오래 지켜주세요.
안녕히 계십시오.
선생님 사랑합니다.
10월 7일
<졸업사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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